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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그리스도인] 44.수도회 창설자편 (5)성 이냐시오(상)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05-01-16 수정일 2005-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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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검 성모마리아께 봉헌

부농집안서 기사의 꿈 키워

신심서적 읽고 회개의 길로

『영혼의 영원한 복락을 위한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이 주는 중요성은 지난 3세기 동안 증명되었으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증거, 다시 말해서 짧은 시간에 고행의 길과 경건함의 실행을 스스로 구분할 수 있게 되는 증거에서 증명되었습니다』(교황 레오 13세).

「예수회」 창설자이면서 그리스도교 영성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영신수련」 저술을 통해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성의 깊이를 심화시켜 주고 있는 영신수련의 수호성인 로욜라의 이냐시오(1491∼1556).

그는 예수회원들과 함께 깊은 종교적 영성적 영역에 대한 갈등과 교회 지도자 구성원들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던 당시 교회 상황에서 가톨릭 교회의 쇄신과 부흥에 위대한 공헌을 남겼다.

무엇보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은 예수회 영성의 유산인 동시에 기도의 지침서 역할을 해왔으며 회원들은 이를 통해 구세사의 신비를 보다 깊이 꿰뚫어 볼 수 있는 식견을 지니면서 세상의 사도로 살아가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다.

예수회의 사도직은 이러한 「영신수련」의 정신과 함께 「활동하는 가운데 관상하는」(Contemplativus in actione) 성소에 힘입어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활동중 관상」이라는 그의 영성은 교회안에서 평신도들의 역할이 점차 커지고 있는 시대적 상황에서 신앙과 생활을 통합시켜 줄 수 있는 평신도 영성의 중요한 포인트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이냐시오는 1491년 스페인 키푸스코아 지방의 아스페이티아읍 위쪽 로욜라 성에서 벨드란 이바네즈와 마리나 사에즈의 막내로 태어났다.

로욜라 가문은 바스크 지역의 귀푸즈콰 지방의 부농들 중 하나로서14세기 이래로 귀족의 계급에 올라 있었다. 당시 귀족들이 카스틸리엔 왕가에서 공을 쌓아 부와 명예를 넓혀가려 힘썼던 상황에서 바스크 지역 출신이고 카스틸리엔 궁중 기사 출신이라는 그의 성장 배경은 훗날 수도회 총장으로 사는 삶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즉 예수회의 이념을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라고 설정한 그의 이상은 「좀 더 높고 위대한 큰 일들」을 추구했던 기사도 정신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13세 되던해 아버지를 여의고 당시 궁정 재무를 담당했던 친척 돈 후안 벨라즈퀘즈 드 궤라의 집으로 가게 됐던 이냐시오는 그의 아이들과 함께 교육을 받으며 궁정 기사로서의 소양을 익혔고 또 왕가 문서국에서 일하기 위한 자질을 익혔다.

이 시기에 이냐시오는 세속적인 것과 영성적인 것의 극단의 다른 두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 하나는 프란치스코수도회 정신에 따른 전통과 직접적 관계를 맺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르네상스의 정신을 대면하게 된 것이다. 이냐시오는 후에 이때부터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했다고 고백했는데 그런 고백만큼 그는 최신 유행 헤어스타일과 새로운 의상을 즐겼으며 격투기 같은 것에도 큰 관심을 보였고 궁중내 수많은 여성들과도 염문을 뿌렸다.

이냐시오가 이러한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은 벨라즈퀘즈 데 궤라 가문이 몰락하고 1517년 군에 입대하게 되면서다.

날아든 포탄 파편으로 한쪽 다리에 큰 상처를 입었던 그는 수술후 회복기를 갖는 동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책을 고르다 신심 깊은 형수가 지니고 있었던 루돌프 폰 삭센의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전」을 접하게 됐다.

기사들의 영웅담이나 연애 소설에 길들여져 있던 이냐시오에게 이러한 신심 서적은 아주 낯설은 것이었으나 내용을 접할수록 그 깊이에 빠져 들었고 마침내 자신의 삶의 방향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됐다.

기사로서의 공상들은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 뿐이며 아무런 대가도 만족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고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는 삶만이 기쁨과 평화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또 앞의 것은 세상에 속한 것이었고 후자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느끼게 됐다.

이런 즈음에 그는 아기 예수님를 안고 계신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체험했으며 지난 날의 생활에 대한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이에 커다란 위안을 얻은 이냐시오는 마침내 성인들이 살아간 것처럼 채소만 먹고 엄격한 고행을 하면서 맨발로 예루살렘을 순례하기로 결정했다. 회심의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이후부터 이냐시오의 내면 세계는 점차 변해갔다. 예루살렘 순례를 위해 조금씩 준비를 해나갔고 기도 독서와 함께 예수의 생애와 성인들의 삶을 따라가는데 필요한 중요한 것들을 세심하게 기록해 나갔다.

1522년 로욜라 성을 떠난 이냐시오는 당시 중요 성지 순례지중 하나였던 「몽세라」에서 총 고해성사를 했으며 자신이 입고 있던 기사의 갑옷과 무장을 거지에게 주고 대신 포대로 짠 두루마기를 걸쳤다. 그리고 기사의 상징인 장검과 단검을 성모마리아께 봉헌했다.

이주연 기자